[그림이 있는 에세이] 여름방학 / 최성환, 화가

싱그러운 햇살이 초여름 바람을 타고 무성해진 나뭇잎 위로 노랗게 떨어진다. 연한 초록을 밀어 올리던 모습은 진달래, 산 벚나무, 돌배나무 꽃향기를 맡으며 조팝나무와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날 푸르게 푸르게 여름의 문턱으로 성큼 다가왔다. 소쩍새 소쩍소쩍 울고, 휘파람새 휘이휘이, 뻐꾹새 뻐꾹뻐꾹 산울림으로 돌아오면 여름이 온 것이 확실하다. 작업실이 있는 산촌은 한낮의 햇볕은 따가워도 아침저녁은 쌀쌀해서 외투를 걸쳐야 한다.

산 너머 햇살이 고개를 내밀 준비하는 이른 새벽 마당에 나서면, 짙은 녹색이 점점 밝은색 옷을 갈아입으면서 세상이 맑아진다. 초입에 심어둔 토마토, 가지, 오이, 고추에 물을 주고 한 뼘 두 뼘 재어본다. 열매를 먹을 때의 즐거움도 있지만, 새싹이 자라는 모양을 매일 볼 수 있다는 건 매우 기쁜 일이다. 마당 가장자리에는 다 자란 머윗대와 한창 키를 뽐내는 옥잠화 잎사귀 사이로 노랗게 모습을 드러낸 애기똥풀이 있고, 개망초는 곧 꽃을 피울 듯이 머리에 부푼 꽃망울을 이고 있다.

외등 아래 다소곳이 자리한 할미꽃은 소임을 다한 뒤 하얀 솜털을 머리에 붙이고 바람에 하나씩 날려 보낸다. 주위를 둘러보면 돌나물은 곧 노란 꽃들을 무더기로 피워낼 것이고, 땅바닥에 엎드린 민들레 사이사이에는 비단풀과 질경이가 있다. 제비꽃은 씨앗을 다 내보내고 껍질만 사방으로 팔을 벌리고 있다. 가을이면 주황색의 멋진 자태를 뽐낼 감나무는 이제 막 꽃 피울 준비를 하고 땅속의 기운을 밀어 올린다. 그 아래로 몇 해 전 지인에게서 가져다 심은 꽃 양귀비 씨앗이 바람에 날려 무더기로 피어나 주위를 붉은색으로 물들인다.

사각거리는 댓잎 소리에 놀란 참새들이 날아오르면 아침 점호를 끝내고 커피를 내린다. 원두가 갈리는 소리에 묻어나는 커피 향은 아침 공기로 인해 더욱 더 구수하다. 온기를 두 손으로 느끼며 집 옆에 딸린 작업실로 향한다. 밤새 주고받은 대화로 가득한 물감 향기를 맡으며 멀리 동구 밖이 내다보이는 화실의 창을 연다. 커피 향이 코끝을 스칠 때쯤 창 너머 매실나무 사이로 예닐곱 살 아이들이 지나간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제비 새끼처럼 재잘대고, 손에는 작대기 하나씩 들고 신이 났다. 평소 늦잠을 즐기는 아이들도 주말에는 깨워주지 않아도 어김없이 일찍 일어난다. 어린 시절 우리가 모두 그랬던 것처럼. 주중에 한적했던 시골 마을은 주말이면 대처로 간 자식들이 손자, 손녀들을 앞세워 고향을 방문한다.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도 시골에서 하루만 지내면 스스로 놀거리를 찾아 열심히 기웃거린다.

아이들이 지나간 후 옛 생각에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어린 시절에는 모자란 것도 많았지만, 부족함 없이 늘 신나게 노는 게 하루의 전부였다. 한낮의 열기로 풀 냄새가 후끈 달아오르면, 미루나무 숲이 길게 늘어선 개울가 모래톱으로 몰려다니곤 했다. 강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개울물에 하나둘씩 뛰어든다. 정신없이 깔깔거리며 놀다 보면 어느새 추워져 낮 동안 달궈진 조약돌에 몸을 눕힌다. 하늘에 수놓아진 것은 뭉게구름, 새털구름, 양떼구름이라고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들려준다.

온종일 할 일을 끝낸 태양은 이내 피곤해져 흐물흐물 붉은 노을을 토해낸다. 저녁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면 놀이에 지친 우리는 서로 약속한 듯이 저 멀리 원두막을 향해 나아간다. 그곳에는 늘 수박과 참외가 한낮의 열기를 머금고 옹기종기 누워있다. 비포장 길을 내달려 뽀얀 먼지가 사라질 즈음, 온통 수박이 가득한 곳으로 살금살금 다가간다. 그 시절 웬만한 밭에는 울타리가 없었다. 기껏해야 기둥을 세우고 나뭇가지를 가로질러 경계를 표시한 정도였다. 한 명은 망을 보고 서너 명은 소리 없이 밭고랑으로 기어가 잘 익었다고 생각한 수박을 한 덩이씩 품에 안고 나온다. 그중 경험이 있거나 형으로부터 수박 서리 개인 지도(?)를 받은 아이는 작은 손으로 수박을 두드려보고 기분 좋게 들고 나온다.

원두막에는 잠들었는지 누워있는 주인의 코 고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온다. 그도 어렸을 때 서리한 경험이 있었던지라 다 알고 있더라도 일부러 깊이 잠든 척을 하는 것이다. 당시 어른들도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부터 그렇게 놀았다. 그리고 애써 쫓으려 하다가는 오히려 천방지축 아이들이 밭을 밟아서 다 망쳐 놓는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차라리 수박 몇 덩이를 선물로 주는 게 훨씬 이득이라는 점은 이어져 온 불문율이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어린 시절 아름다운 추억이다. 재잘거리던 아이들이 새참을 먹을 때쯤, 손에는 각자 나름대로 소중한 것 하나씩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햇살이 화실 천장 가득 내려오면, 주섬주섬 화구를 챙겨 화폭과 마주한다. 오늘도 나는 보물 상자에서 부족했지만 즐거웠던 추억 하나를 꺼내 캔버스에 담는다. 날마다 행복해길 바라며.

 

 

* 1960년 경북 영천 출생. 홍익대학교 대학원 동양화과 석사. 개인전 34회 및 국내외 아트 페어 100여 회, 그룹전 500여 회. 현재 시골에서 그림 그리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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