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그 상상의 공간 _ 어느 낯선 우체국 / 변종모, 사진작가


    

오늘의 분량을 다 걸어내고 주저앉은 곳이 결국 우체국 앞이다. 엽서 한 장 보내달라던 말이 자꾸만 방향을 드러내며 나도 모르게 나를 우체국 계단에 주저앉혔다. 말보다 글의 유효기간은 더욱 강한 것이라 여겼기에 함부로 전할 수 없는 말들을 생각하며 오래도록 걸었다. 그리고 지금 푸른 잎들이 마지막 옷을 갈아입는 스페인의 남쪽, 어느 낯선 우체국 앞에서 무거워진 다리를 모은다. 이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여행자도 아니고 생활인도 아니며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소외된 자도 아니다. 단지, 혼자인 것뿐이다.

그래서 당분간은 그냥 내 몸의 쓸모에 대해서만 생각하면서 걷는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장 뒤에 숨은 낱말처럼 드러나지 않도록 걸었다. 걷다 멈춘 곳이 낯선 우체국 앞일뿐이었다. 낙엽 보다 먼저 노을이 지고 있다. 간혹 성급하게 단풍 든 잎들이 오래된 편지지처럼 건조하게 나뒹구는 시간이다. 언제나 떠나온 자의 시간은 더디고 남은 자들의 시간은 쏜살같아서 한 번의 안부쯤이야 건너뛰어도 세상은 변함없겠지만 자꾸만 속으로 물음표들이 쌓인다. 세상의 낙엽보다 많은 사연들이 연약하게 엉켜있을 우체국 앞으로 해가 진다. 해가 지는 방향으로 내 모든 것이 기운다. 기울어진 마음이 전해지면 간혹 그대에게 빛나는 별로 뜨기도 할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 K는 나에게 먼 곳에 도착하거든 엽서 한 장 보내달라는 말로 그날의 인사를 하고 황급히 사라졌다. 남은 분량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돌아서는 하이힐이 군화처럼 씩씩하다. 어디서든, 어떤 말이든 괜찮다며 힘차게 군가를 부르듯 손을 흔드는 모습에는 아무런 그리움도 외로움도 없었다. 단지 K가 걸어 들어간 빌딩 속의 거리가 거대한 쓸쓸함에 갇혀 절대로 흐트러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외롭다면 외로운 것일 수 있겠다 싶었다.

이유도 모르고 달리는 시간 앞에서 깜빡깜빡 졸듯이 하루하루를 살아낸다는 말이 부상당한 병사처럼 아팠다. 하지만 그 상처는 내 것이 아니라서 잠시였고, 나는 나의 의지대로 걷는 평온한 이 길 위에서도 날마다 나만 생각하며 걸었다. 때로는 누군가의 진심 어린 부탁도 깊이 새기지 않으면 짧은 저녁노을도 되지 못한다. K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주 떠나는 나에게 부탁도 아니고 바람도 아닌 조금의 애틋함을 섞어 마지막 인사를 했기에 흔한 말이라 생각했다. 흔한 말들. 또는 마음 없는 말이라 여겼다. 그러나 엽서 한 장이라는 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가 않다. K가 했던 어디서든이라는 말보다 어떤 말이든이라는 단어가 가슴속 깊이 낙엽이 다 털려나간 고목처럼 박혀서 성가셨다.

그 이후로 자주 엽서를 쓴다.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어디서든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때그때 엽서를 쓰고, 부치든 부치지 못하든 쓴다. 쓰는 동안 천천히 내가 걸어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떠나지 못한 자들에게로 걸어가 낯선 곳에서 함께 앉은 다정함으로 쓴다. 말로 해도 될 말을 쓴다. 어떤 말이라도 상관없다던 그 말의 곁으로 걸어가 앉는다. 그렇게 하다 보니 써달라고 부탁하던 사람 보다 내가 더 좋아져 새로운 여행이 되기도 했다. 어디서든 쓰기도 하고 어떤 말이든 쓰기도 한다. 육중한 건물에 갇혀 먼 곳을 바라보는 K에게 쓰기도 했고, 내가 나에게 쓰기도 했다. 말하면서 느꼈다면 쓰면서 알아간다. 그러니까 가만히 앉아서도 먼 여행을 한다. 편지라는 것이 그렇다. 전화보다 더디고 뭉툭해서 빠르게 도달할 수 없을지라도언젠가는 닿을 것이다. 깊고 든든하게 기억될 것이다. 산다는 건 결국 밖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동하는 것 아니겠나. 자리를 찾지 못하고 낙엽처럼 굴러다니는 열쇠고리보다야 한 장의 엽서를 원하는 이유. 그 이유를 잘 안다.

그대, 그대도 먼 곳에 가거든 길 떠나고 없는 나의 빈집에 엽서 한 장 보내 달라. 돌아온 자리가 따뜻할 수 있도록 아무런 가치 없는 빈말이라도 나에게 엽서 한 장 보내 달라. 그것으로 따뜻해져 한동안 힘을 내어 내가 걸었던 길 위의 일들을 그대에게 선물하겠다. 경쾌하게 보내는 말도 잠시 다정하게 나를 껴안을 수 있겠지만, 심장으로 또박또박 눌러쓴 마음의 말은 오래도록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대여! 가을이 오면 편지를 쓰자. 쓰면서 오고 가는 마음들로 좋은 여행을 하자. 첫 줄을 쓰면서 이미 그대는 세상의 끝에 있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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