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오후의 그림카페 _ 쉼표, 나만의 리듬 _ 보담 _ 일러스트레이터

오늘은 외주 일이 없는 날. 마감에 쫓기는 것이 없으니 오늘은 꼭 마음 편하게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일어난다. 가령 커피 한 잔을 여유 있게 내리고, 그동안 책 수집가처럼 사놓기만 했던 책들을 읽는다든지, 가벼운 차림으로 동네 산책을 한 바퀴 하고,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러 가는 소박한 날들을 보내면 참 좋겠다. 그런데 나는 머리로만 여유로울 뿐, 일어나자마자 누군가에게 쫓기듯 일찌감치 노트북을 켜고 아이패드를 만진다. 습관처럼 아이패드에 켜 놓은 흰색 캔버스를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마음이 답답하고 무엇을 그려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 멍하니 흰색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으니 불안하고 울렁거리는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온다. 요 며칠 내내 이런 상태인데,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도 싫은 그 단어 ‘슬럼프’가 찾아왔다. 

퇴사하고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한 지 약 7년, 회사에 다니면서 느껴본 적 없는 이 낯선 증상은 프리랜서로 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 찾아왔다. 말 그대로 무엇을 그려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리고 싶은 것도 없는데 그렇다고 마냥 놀 수도 없는, 마음 편히 쉬지도 못하고 그림도 그리지 못하는 불안한 마음. 그런 마음을 억누르고 꾸역꾸역 그림을 그려내도 그 그림은 어김없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슬럼프일 때, 나는 아예 그림을 그리지 않기도 하고 되든지 되지 않든지 그림과 씨름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다 할 극복 방법을 지금까지도 찾지 못했다. ‘이러다가 영영 그림을 못 그릴 수도 있겠다. 나는 역시 안 되나 보다. 이대로 끝인가. 앞으로 뭘 해야 하지. 내 인생은 망한 건가….’ 그림에서 인생의 실패까지 걱정하게 될 때쯤, 나는 다시 예전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지만 이런 슬럼프가 참 주기적으로 나를 괴롭혀 왔다.

7년간 수많은 슬럼프를 겪으면서 어느 정도 적응됐을 법도 하지만 일주일이면 일주일, 기간을 정할 수도 없고 내려가는 감정의 바닥이 어디까지인지도 모르기에 아쉽게도 처음이나 지금이나 이 증상에 휘둘리며 괴로워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래, 그림도 되지 않는데 아이패드만 켜놓고 있으면 뭐 하나 싶어서 눈앞에 보이는 식물들에 눈길을 돌렸다. 내 마음과는 다르게 햇빛을 받아 싱그럽고 파란 초록색이 아름다운 나의 반려 식물들. 열심히 연둣빛 새잎들을 내어주며 생명력을 뿜어내는 올리브 나무와 호프 셀렘 사이에 조화처럼 멈춰버린 알리 고무나무가 눈에 띄었다. 그 모습이 지금의 나와 같아 보인다. 알리 고무나무는 나와 함께 지낸 지 약 2년 정도 되어간다. 집에 오자마자 바뀐 환경에 적응을 빨리하더니 새잎을 많이도 내주어 식물 키우는 기쁨을 주었는데, 최근 몇 달은 자라지도 않고 내내 그 자리를 맴돌고 있다. ‘딱 지금의 나와 비슷한 처지로구나….’

몇 년 전의 초보 식집사였다면 물을 더 주거나 영양제를 처방하기도 하고 자리를 이동시키면서 식물이 이대로 죽지는 않을까 안절부절못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벌써 식집사 5년차. 지금의 나는 식물들도 자기들만의 리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식물들은 아침에는 없던 새잎이 그날 저녁에 보면 빠끔 얼굴을 내밀고 있는 폭풍 성장의 시기가 있는 반면, 영양제를 주거나 분갈이를 하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해도 새잎을 보여주지 않고 성장이 그대로 멈춰버린 듯한 시기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식물이 정말 죽었다거나 성장을 멈춰버린 것은 아니다.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하고 마른 가지에서도 작고 연한 새잎이 나기도 하고, 조화처럼 몇 달 성장을 멈췄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루아침에 맑고 반짝이는 새잎을 내어주기도 한다. 아마도 식물들은 그동안 자라지 않고 멈춰있던 게 아니라 흙 속에서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거나 줄기나 기둥을 탄탄하고 두껍게 만드는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제 나름대로 열심히 성장 중이었을 것이다.

알리 고무나무도 다음 성장을 위해 지금은 숨을 고르고 있는 시기일 거라고 생각하니 끝나지 않을 듯한 나의 이 지긋지긋한 ‘슬럼프’도 잠시 숨을 고르라고 온 쉼표가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슬럼프는 더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을 때 찾아왔다. 더 잘하고 싶은 조급한 마음이 슬럼프가 되었고, 그 터널을 지나고 나면 언제나 나는 나도 모르게 조금 더 성장해 있었다. 이번 시기도 나를 믿고 잠시 기다려봐야겠다. 식물에도 저마다의 리듬이 있듯이 내게도 나만의 리듬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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