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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읽다-2회
어디에도 있을 재난 속 세계에게
강해인, 영화평론가
20대 초반, 남산에 올라 처음 본 서울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빛이 모여 은하수처럼 흐르던 게 절경이었고, 저 어딘가에 내 미래도 빛나고 있을 것만 같아 마냥 설렜다. 20대 중반, 그 자리에서 본 서울의 야경은 그때와 달랐다. 적막한 밤에도 꺼지지 않는 불빛들 사이에 나 하나 일할 곳이 없다는 게 서글펐다. 그리고 30대가 훌쩍 넘은 지금, 야경을 보러 가지 않고 있다. 빼곡하게 도심을 가득 채운 빛 어디에도 맘 편히 발 뻗고 누울 내 집이 없다는 현실이 서러울 것 같았다.
황궁 아파트 주민들에게 ‘내 집’은 더 큰 가치가 있는 곳이다. 쉴 곳을 넘어 사회 계층을 증명할 신분증이자 삶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훈장이었다. 그리고 전대미문의 대지진으로 쑥대밭이 된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은 건물은 그들을 지켜주는 최후의 안전망이기도 했다. 재난에서 살아남은 주민들은 이 공간을 소유하고, 독점하기 위해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벽을 쌓는다. 동시에 부재한 국가와 정부의 자리를 대체할 주민 시스템을 구축하고, 투표로 대표를 선발한다.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주민 대표가 된 영탁(이병헌)은 폭력을 앞세워 외부인을 몰아내고, 주민이 아닌 이들을 약탈하며 황궁 아파트를 지켜 나간다.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만든 시스템은 민주주의 국가의 그것과 닮았다. 국가가 시민에게 부여하는 권리와 의무, 그들을 지키기 위한 공권력 등을 목격할 수 있다. 주민들은 회의를 통해 의견을 공유했고 안전을 보장받았으며, 주민 모두가 공평하게 투표권 등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동시에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지켜야 할 규칙과 부담해야 하는 역할 등의 의무가 있었다. 또한, 투표로 선출된 조직의 대표는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아파트를 지키고, 내부 시스템의 붕괴를 예방하기 위해 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조직을 결성했다.
많은 재난 영화가 그랬듯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도 가족을 지키고 생존하기 위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런데 극의 중심에 있는 명화(박보영)와 민성(박서준) 부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아파트 생활에 적응하며 갈등을 보인다. 명화는 영탁의 방식이 폭력적이라 생각하고, 이 주민 시스템이 품지 못한 약자까지 보호하려 했다. 반대로 민성은 영탁의 조직 활동에 헌신하면서 점차 중요한 사람이 되어 간다. 그는 생존을 대가로 폭력에 물들고, 약자를 배척하면서 영탁 같은 인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생존이라는 명분 아래서. 하지만, 그가 추구하던 안전은 그리 오래 보장받지 못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영탁이 조직한 강력한 힘이 외부가 아닌 내부를 향하고, 이를 계기로 도미노처럼 황궁 아파트가 구축한 시스템과 안전에 균열이 일어난다. 폭력으로 통제되던 주민들의 불안과 불만, 그리고 더 잔혹하게 변한 외부의 약자들의 힘이 동시에 작동하며 황궁 아파트가 쌓은 바리케이드와 영탁의 제국은 무너진다. 폐허가 된 땅 위에 홀로 우뚝 솟아 있던 황궁 아파트는 그 건물의 이미지처럼 위에서 아래로 통제하는 힘을 추구했고, 결국 파멸을 맞이한다. 더 강한 자가 더 많은 걸 얻었던 ‘황궁 아파트’ 같은 전개였고, 홀로 솟아 빛났던 아파트는 참혹한 콜로세움이 되어 피가 고인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파트 주민들의 상황을 보여줄 때, 극단적으로 위에서 아래를 보는 숏과 아래에서 위를 보는 숏을 활용했다. 위와 아래의 공간을 구분하는 이러한 연출 덕에 초반부의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외부인보다 더 강하고, 안전한 곳에 군림한 존재처럼 화면에 담겼다. 하지만 황궁 아파트의 붕괴라는 결말 앞에서 우리는 알게 된다. 그 숏들이 주민들에게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낭떠러지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신호였다는 것을.
생존자 명화가 마지막에 도달한 공간에서 이런 수직의 구도는 더 대비된다. 그곳은 누워있는 아파트 단지로 높이가 중요하지 않다. 도시가 추구하던 가치가 쓰러진 곳. 이곳에서 생존자들은 황궁 아파트처럼 수직의 통제가 아닌 수평적인 배려와 나눔을 실천하며 함께 잘살고 있다. 위험해 보였던 외부에 평화가 있었고, 안전해 보였던 내부가 위험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곳이었다는 진실 앞에 명화는 할 말을 잃는다. 이 엔딩은 아름답지만 낯설다. 이토록 잔혹한 세계에서 저런 동화 같은 공존이 가능한지 믿을 수 없었고, 여태 보고 있던 영화의 질감과 다른 따뜻한 분위기, 그것이 도시의 가치를 부정하는 듯해 괴리감마저 느껴야 했다. 스크린 반대쪽의 관객으로서 이 결말은 명화의 꿈처럼 보였다.
‘유토피아’는 공산주의 경제 체제와 민주주의 정치 체계를 가진 이상적인 공간을 뜻한다. 섞이기 힘든 것들의 공존을 말하기에 ‘어디에도 없는 장소’, ‘이상향’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 단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난에서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황궁 아파트를 이상향이라 말하다 뒤통수를 치는 영화였다. 뒤이어 이 콘크리트 위에 건설된 사회 속에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곳, 이상향은 어디에도 없다’라는 씁쓸한 외침이 들리는 것만 같아 숙연해졌다. 영화 밖 우리는 어떤 땅 위에 서 있는 걸까. 심각한 재난 위는 아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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