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스토리 _ 인간의 가치, 인간의 쓸모 _ 김신영

아날로그 스토리

인간의 가치, 인간의 쓸모 

붕괴 위기의 사회는 개인의 삶 안팎에도 빗금을 긋는다. 그 사선(斜線)은 종종 사선(死線)이 되어 일상의 틈을 좁혀온다. 비켜난 삶 속에서 소외된 개인은 타인을 소외시키고, 결국 서로는 서로를 타자화한다.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에서부터. 미국의 현대 극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 1915~2005)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 Death of a Salesman>(1949)은 이처럼 개인에서 사회로, 사회에서 개인으로 시선을 옮겨가며 공동체의 균열과 사회적 병리 현상을 냉소적으로 보여준다. 1949년 2월 10일, 뉴욕 모로스코 극장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연극계 3대 상인 퓰리처상, 토니상, 뉴욕 연극비평가상을 휩쓸었고 영화로도 제작되어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인정받았다. 

사회의 비극은 개인의 비극을 비켜 가지 않고 문학 작품으로 형상화되어 시대와 공명한다. 리얼리즘 미학 정신으로 구현된 <세일즈맨의 죽음>은 소시민의 갈등과 고뇌를 일상 언어로 녹여 내 현실의 모순을 첨예하게 묘사했다. 작가는 이 작품이 수많은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에 대해 “별로 착하지도 않는 사람의 모습을 끊임없이 나타냈으며,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 우리가 한번 능률 형태에 자신을 맞추는 일에 실패할 때, 우리는 결국 외로우며 가치도 없고 심지어는 인간으로서의 요소도 없다는 사실을 나타냈기 때문이다”1)라고 했다. 

현대인의 상실된 시간과 공간을 조명하며 현실을 직시한 <세일즈맨의 죽음>이 동명의 연극으로 다시 무대에 올랐다(5.21~6.7). 백상예술대상 ‘백상연극상’, 동아연극상 ‘연출상’을 수상한 신유청 연출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것. 주인공 ‘윌리 로먼’ 역은 연기 인생 60주년을 맞은 박근형 배우가 맡았는데, 엄청난 대사량과 다층적인 내면 연기를 소화해 내며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재입증했다. 45년 경력의 베테랑 배우 예수정은 남편에 대한 존경심과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일관한 삶을 산 ‘린다 로먼’으로 분해 절제된 연기와 철학적 깊이를 보여줬다. 윌리의 결핍과 꿈의 투사 대상인 큰아들 ‘비프 로먼’은 성태준과 이형훈이, 허세와 향락에 빠진 작은아들 ‘해피 로먼’은 김동완과 윤상훈이 연기해 극의 활기를 더했다. 

뉴욕 브루클린의 평범한 소시민 윌리 로먼은 30년이 넘는 세월을 세일즈맨, 즉 외판원으로 고투하며 길 위의 모험가이자 여행자로 살아왔다. 그는 아서 밀러의 삼촌 매니 뉴먼(Manny Newman)을 모티브로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세일즈맨이었던 뉴먼은 대공황 시절 사업 실패로 인한 좌절감과 무력감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언어유희적으로 윌리 로먼(Willy Loman)을 ‘Low man’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는 전통적인 비극의 주인공과는 차별화된 소시민의 비극성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이는 “평민도 왕과 마찬가지로 고도의 의미에서의 비극의 주인이 될 수 있다”(a, p.17)라고 밝힌 아서 밀러의 사회비극론과 맞닿아 있으며, 사회극(社會劇)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본성을 파고들어 그의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필요가 사회개념의 어휘로 확대·외형화 되어야 한다.”(a, p.34) 

그렇다면 자본주의적 욕망이 낳은 배금주의와 물질만능주의 앞에서 인간은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1930년대 경제 대공황의 암울한 현실에 함몰된 윌리는 시장에서 도태되어 노동 가치의 하락과 실직을 겪으며 낙망한다. 조현병까지 앓았던 그는 진실과 본질을 외면한 채 환각 속에서 마지막 희망을 죽음으로 치환한다. 언쟁 끝에 비프가 흘린 눈물을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확신한 그는, 가족에게 보험금을 남겨주겠다는 희망을 품고 과속 운전으로 자살을 택한다. 무용하고 무가치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인간성 회복의 길이라 자부하며. 그는 자신의 사회적 죽음을 생물학적 죽음으로 대체했고, 종국에는 인간적 죽음에 이르길 바랐을 것이다. 한편, 그의 죽음은 ‘아메리칸드림’의 몰락을 상징하기도 한다. 

극의 에필로그인 ‘레퀴엠’을 제외하고는 불과 24시간 동안 가속페달을 밟으며 죽음을 향해 돌진한 이 비극적인 서사는 가족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바라본 현대사회의 알레고리이다. 유물론적 사고에 급격히 치우친 윌리의 꿈과 삶의 시제는 현재가 아닌 과거였다. 그의 가치관과 정체성도 어쩌면 사회적 산물 아닐까. 태도가 행동을 결정한다고 했던가. 그는 어리석음과 위선적인 태도로 잡히지 않는 꿈에 사로잡혀 과대자기(grandiose self)를 더욱 부풀린다. 그러나 왜곡된 신념은 붕괴하고 존재는 몰락한다. 물론 여기에는 양립된 가능성이 내재한다. 존재론적으로는 하강 그 자체일 수도 있고, 자기완성(상승)을 위한 하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윌리의 심리를 기반으로 한 플래시백(flashback) 기법으로 플롯을 구축했다. 과거와 현재를 교차한 시점(時點)의 유연성은 다양한 시점(視點)을 제공한다. 암전 대신 물리적인 벽을 제거한 무대 연출은 장면 전환을 매끄럽게 했는데, 이러한 과거 회상은 인물의 권태와 심리적 공허, 봉합이 절실한 부자 관계에 더한층 몰입하게 한다. 윌리의 위태로운 내면,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부분으로서의 개인, 합으로서의 사회가 부표도 없이 좌초된 모습이 포착된다. 현실에 대한 불만족과 불행한 의식은 현실 회피를 부추기고, 그는 환상과 실재, 허상과 실체,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행로를 잃는다. 

윌리 가족은 소통의 부재로 진통을 겪는데, 유일하게 진실과 대면한 인물이 비프이다. 그는 주된 갈등 관계인 아버지 윌리에게 불편한 진실을 쏟아낸다. “저는 사람들의 리더가 되지 못하고,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예요. 열심히 일해 봤자 결국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세일즈맨일 뿐이잖아요. 저는 시간당 1달러짜리예요!”2) 윌리는 자신이 ‘무엇’을, ‘왜’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인식했을까. 맹목적 신념은 신앙에서 우상으로 견고해지며 그릇된 이상과 욕망은 비극을 초래한다. 윌리가 비프의 개성과 본성을 존중해 주며 인맥만이 아닌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성실함을 가르쳤다면, 건강한 자기애로 내연을 확장해 성공이 아닌 성장을 기대했다면 어땠을까. 윌리 자신도 마찬가지. 비프는 윌리의 그림자를 닮았다.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그들에게는 ‘진짜 아버지’가 필요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연극계 최고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은 <세일즈맨의 죽음>은 그 시대, 특정한 개인만의 특수성과 개별성을 넘어 현시대의 보편성에 수렴된다. ‘the salesman’이 아닌 ‘a salesman’의 이야기인 것. 윌리가 예상한 화려함과는 달리 한산한 장례식에서 린다가 읊조린 마지막 대사는 세상의 모든 윌리를 불러낸다. “(…) 오늘 주택 할부금을 다 갚았어요. 오늘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 집에는 아무도 없어요. 이제 우리는 빚진 것도 없이 자유로운데. 자유롭다고요. 자유롭다고요. 자유….”(b, p.174) 인간의 진정한 비극은 진실을 외면할 때 고개를 내민다.  

글. 김신영 편집장 

사진 제공. (유)쇼앤텔플레이, (주)와이엠스토리

1) 아서 밀러, 김의경 譯, <연극론 12장 The Theater Essays Of Arthur Miller>, 문학사상사, 1978, p.32. 이하 같은 책 (a, 쪽)으로 표기.

2) 아서 밀러, 강유나 譯, <세일즈맨의 죽음>, (주)민음사, 2022, p.161. 이하 같은 책 (b, 쪽)으로 표기.

* 책 사진: 초판본 표지(Viking Press)

** 작가 사진: 1966년의 아서 밀러. ⓒ Koch, Eric / Anefo